[감상문]나의 싱클레어
이번 여름, 나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던 헤르만 헤세전에 갔었다. 헤르만 헤세에 대해 아는 건 데미안이라는 책밖에 없었으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어렸을 때 데미안을 스쳐가듯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책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내내 한 곳에 꽂혀 있었던 데미안은 3년간 신경이 쓰였는데도 아주 긴 혼란기를 겪고 있었던 나에게 그다지 끌리는 책은 아니었다. 유년기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무시했듯, 나는 묘한 이끌림이 느껴졌던 그 책을 외면했다. 대학생이 되고 긴 혼란기가 끝나갈 때쯤 우연히 헤르만 헤세전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의 일생, 그렸던 그림들과 책 속에 담긴 좋은 글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쓴 데미안은 헤세의 대표작이었기 때문에 전시회에서 데미안과 관련된 자료가 아주 많았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편안한 전시회의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은 여유가 생겼던 내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꼭 데미안이 읽고 싶어졌다.
방학 때부터 하고 싶었던 독서클럽에 선정이 되고 읽을 책들을 고르는데 데미안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때 봤던 똑같은 책이 먼 길을 돌아 나에게 왔다.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실망할까봐 겁도 났다. 간단히 쓰여 있었던 작가의 말부터 감동적이었다. 2주간 몇 번을 읽어 보았다. 내가 싱클레어가 된 것 같았다. 아니면 싱클레어가 나였을 수도 있다. 내 삶은 싱클레어와 닮아 있었고 항상 안내자를 갈망했다.
나는 소심하지만 밝았던 유년기를 거쳤으며 내가 누군지에 대해 고민했던 10대를 보냈다. 공부에 대한 집착과 동시에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친구관계는 복잡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내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점수에 목맸고 내 책상이 어디에 배치되는지에 민감했다. 우리 학교에서 책상의 위치는 성적의 계급을 의미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동시에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은 해결될 거라 믿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엔 항상 내가 누군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소심하다. 하지만 그만큼 외향적이었으며, 게으르면서도 부지런했다. 나는 양면의 모습을 가졌다. 도대체 나란 누구인가?
고3이 되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더 갈망할수록 답은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유년기를 지나 방황하던 싱클레어처럼 방황했다. 나에게 19살은 폭풍과도 같았다.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내가 학생의 꼬리표를 단 순간부터 들였던 공은 9월에 빛났고 추운 11월에 급격히 꺼져버렸다. 이유도 몰랐지만 해야만 했던, 내가 답을 찾기 위해 가야만 했던 곳은 무너져 버렸다. 어둠 그 자체였다. 희망은 없었고 나는 텅 빈 사람이 되었다.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데미안을 만났다. 항상 내 옆에 있었던 데미안을 가장 절망적인 순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나에게 데미안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아직도 부모님이 안내해준 그 길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서툴어도 진심어린 마음을 보여줬던 부모님으로 인해 나는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었다. 데미안처럼 완벽하진 못했지만 먼저 인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나를 이끌어 주었다. 한없이 쓸모없었던 나는 다시 일어나 대학을 정했으며, 긴 겨울방학동안 나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랑받는 딸이었으며,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20대였다. 삶에서 고작 걸음마를 뗀 아기였다. 또한 나는 나였다. 소심하면서도 긍정적이었고, 게으르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성실한 사람이었다. 분명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새로웠다. 쓰렸던 기억들은 아프면서도 소중한 것으로 남았다.
한층 더 성장했던 20살을 뒤로하고 곧 졸업반이 된다. 취업과 사회가 나를 억누르는 와중에 나는 헤세를 만났고, 데미안을 마주했다. 정신없었던 나에게 싱클레어는 과거의 내가 되어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인지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모든 사람은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어렴풋이 느꼈던 삶의 이유는 명확해졌다. 나는 새가 되어 알을 깨고 나올 준비가 되었다.
인문학부 문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