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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클럽 '부커스' /감상문

나는 김지영씨를 이해할 수 없다

가수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말을 하자 많은 남성팬들은 큰 실망감을 표했다. 악플과 함께 팬이기를 포기하겠다는 탈덕선언을 하는가 하면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우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 책이 뭐길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토록이나 사람을 못살게 굴까 .

페미니즘도서라며 금서 취급하는 남성들이 있지만, 이 책은 이미 7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리고 김지영 열풍은 한국을 넘어 대만에도 한창이다. 번역판이 출판 준비 중이며 전자책사이트에서는 이미 인기도서라고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임에도 허황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여성들이 살면서 겪어봤을 법한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김지영씨의 이야기는 남일 같지가 않았다. 여자아이를 임신했을 때 눈치가 보였다거나, 대학교에서 성희롱을 당한다거나, 버스정류장에서 누가 몸을 만졌다는 이야기는 낯설지가 않다.

독서의 큰 장점 중 하나는 간접적인 경험이라고 한다. 82년생을 김지영은 3번 정도 읽었는데 매번 읽을 때마다 전에 없던 구절이 들어오거나 새로운 영감이 번뜩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에는 김지영씨의 삶을 훑어보면서 불편하고 안타깝다는 감정을 느끼는데 그쳤다면 이제는 조금씩 화가 난다. 여자아이를 임신할까봐 걱정하는 오미숙씨에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남학생에게 위협을 당한 김지영씨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한 지영씨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고생했다, 내 인생 성공했다, 잘 살았다고 자화자찬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어이가 없고 맥이 빠져버린다.조금씩이지만 김지영씨의 삶을 간접경험 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녀에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됐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김지영씨의 삶은 여성혐오로 가득하다.혐오는 어감이 강한 말이기 때문에 오버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임신을 한 여성이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일까봐 전전긍긍하고, 결국에는 지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혐오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김지영씨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남학생에게 앞번호를 배정하고 여학생에게는 뒷번호를 배정해왔었다. 당시에 김지영씨는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문제인 줄 몰랐다고 한다. 남자가 디폴트값(기준점)이 되는 경우는 이 외에도 많다. 여의사라는 말은 해도 남의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류작가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작가라는 말은 없다. 처음에는 김지영씨가 그랬던 것처럼 페미니스트들이 디폴트값이 남성이라고 불만을 제기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중요한 의논거리가 많은데 겨우 그런 걸로 트집을 잡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학교는 수강신청을 할 때 의과대학이 디폴트값(기준점)이 된다. 가나다라 순서가 아니기 때문에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의과대학이 기준점으로 선택되어있고 그 다음에 의예과, 의학과, 간호학과가 따른다. 매번 수강신청 할 때 마다 불편하게 내 전공 학과를 찾으면서 어느 순간 이는 의대생들에 대한 특혜이자 다른 학과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느껴졌다. 이후에는 여성들이 디폴트값이 남성인 것에 대한 불만제기를 단순한 투정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김지영씨를 도와주는 사람은 모두 여자이다. 추석에 김지영씨가 오미숙씨의 목소리를 빌려서 정대현씨와 시어머니에게 김지영씨를 처가에 보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당황하는 가운데 김지영씨의 편을 들어준 건 정대현씨의 여동생인 정수현씨 뿐이었다. 그리고 오미숙씨가 김지영씨의 여동생을 지우고 난 후 그녀를 위로해준 것은 할머니 의사의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수업시간에 교탁앞으로 던져진 실내화가 김지영씨가 던진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 것도 뒷자리의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위협을 당하던 김지영씨를 구해준 사람도 여자였다. 그리고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다는 그녀의 말이 김지영씨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줬다. 회사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김지영씨를 도와주고 회사 내 화장실 몰카사건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건 김은실 팀장이었다. 저자는 이런 묘사를 통해 결국 여자를 돕는 건 여자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저자의 이런 지적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최근 유명한 유투버인 양예원씨가 피팅모델 촬영을 하면서 성추행을 당했고 신체가 노출된 사진이 유포됨으로 인해 고통 받았음을 고백했다. 대부분의 여론은 양예원씨에 대해 안타깝다는 반응이지만 일부 남성들은 양예원씨와 그녀를 지지한, 수지를 비롯한 연예인들에 대해 혹시라도 무고죄로 밝혀질 경우 책임져야 한다며 잔뜩 벼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이 차별 받는 현실 속에서, 남성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한 여자 선배가 나름 페미니스트라며 페미니즘 이슈에 관해 아는 체 하는 나에게 남자는 노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여자와 다른 세상에 살기 때문에 전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어쨌든 너는 죽기 전까지 생리통을 모를걸?”이라고 말했다. 소설 속 정대현씨는 김지영씨의 행복을 빌어주고, 취업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좋은 남자친구였다. 그러나 육아를돕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마치 장 볼 때 고등어를 사듯 아이 하나 낳자고 말해서 김지영씨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녀의 성을 정할 때는 은근슬쩍 정씨 성을 쓰자고 한다.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여성들이 차별 받는 현실,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하는 정신과 의사. 그는 아내가 수학문제집을 푸는 걸 보고 아내도 김지영씨도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한 이수연 선생이 사표를 내자 예쁘고 싹싹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커피가 뭔지 아는직원이 일을 그만두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미혼인 사람으로 알아봐야겠다고 한다.

저자의 이런 묘사는 소위 깨어있다고 우쭐대는 나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 같다. 많이 뜨끔했다. 왜냐하면 나는 종종 김지영씨를 비롯해서 여성들의 고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해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성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고, 또 헤아리려고 노력하지만 한 번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고,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과 그들의 고통을 전부 알고 있다고 나서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나도 다른 여성의 입장에서는 정대현씨와 정신과 의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어디까지나 남자로써 그들을 지지하는데 그쳐야 한다. 김지영씨의 마음을, 여성의 고통을 모두 헤아린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위선일 수도 있다.

 

-안수만-